자본확충 급한 은행들 대출 꺼려 … 사모신용, 다급한 기업·소비자에 손길
올해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미 전역의 은행들은 자본을 확충하는 데 여념이 없다. 예금이 줄어들면서 투자자들이 은행의 대차대조 상황을 면밀히 눈여겨보면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중소기업이나 소비자금융기업(온라인후불결제기업, 자동차할부금융기업 등)에 대한 융자를 줄이는 것이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BBW) 최신호는 "이런 상황은 월가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투자자들에겐 큰 기회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바로 사모신용펀드(private credit funds)다. 사모로 자금을 모아 회사채와 대출, 구조화 상품 등에 투자하는 펀드다. 기업지분을 통째 인수하는 바이아웃전략 등을 구사하는 사모펀드가 투자전략 다변화 차원에서 주로 모집한다. 글로벌 사모신용펀드 규모는 1조5000억달러에 달한다.
사모신용펀드를 운용하는 곳은 블랙스톤과 KKR 등 사모펀드 거물도 있고 '캐슬레이크'나 '아탈라야 캐피털 매니지먼트' 등 전문기업들도 있다. 사모신용은 이전에도 기업인수 자금을 대는 중요한 원천이었다. 이제는 은행들이 대거 몸을 사리면서 자동차할부에서 모기지에 이르기까지 자산담보 대출 부문에서 보다 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글로벌 대체투자 자산운용사 '아레스 매니지먼트'의 대체신용 공동대표 조엘 홀싱어는 "자산담보대출 시장에서 많은 기회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수년간 지역은행들은 소비자에 대출을 제공하는 최대 주체였다. 또 성장기회를 엿보는 중소기업들의 재정을 안정시켜 주는 디딤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같은 상황은 끝났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에 따르면 자산순위 25위 이하 미국 은행들의 경우, 올 1월부터 7월 중순까지 약 1330억달러 예금이 사라졌다.
자본을 지키기 위해 은행들은 보유하던 대출채권을 대거 팔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소재 팩웨스트은행은 예금 급감에 대처하려 지난 6월 모기지 등 35억달러 규모 대출채권을 아레스에 매각했지만, 결국 같은 지역의 캘리포니아은행에 인수됐다.
대출을 꺼리는 건 지역은행뿐만 아니다. 연준이 대형은행들의 재정상황을 보다 보수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규정을 논의하면서 규모가 큰 은행들도 몸을 사리고 있다. 대체투자기업 '바르데 파트너스'의 금융서비스 대표 아닉 마믹은 "대형은행들 역시 핵심고객들에게 집중하느라 소비자신용시장에서 발을 빼고 있다"며 "연준이 논의중인 새로운 강화규정이 현실화한다면, 이런 흐름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르데는 골드만삭스 온라인금융 자회사인 '마커스'가 보유하던 약 10억달러 규모의 소비자대출채권을 사들였다.
사모신용은 핀테크기업들에게도 팔을 뻗치면서 소비자경제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KKR은 '페이팔홀딩스'가 갖고 있던 약 440억달러 규모 후불결제 미수금을 사들였다. 캐슬레이크도 온라인대출기업 '업스타트홀딩스'의 할부대출채권 40억달러를 사들이는 데 합의했다.
융자한도를 늘리거나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려는 중소기업들은 은행보다 조건이 유연하고 가용자본이 많은 사모신용펀드를 눈여겨보고 있다. 리전스은행 등에 4250만달러 리볼빙론을 빌린 건설기업 '오리온그룹홀딩스'는 사모신용기업 '화이트 오크 글로벌 어드바이저스'에서 1억300만달러를 융자 받으면서 이전 대출을 대체했다. 독립영화사 '뉴 리전시'는 새로운 영화사업 자본 확충을 위해 은행 문을 두드렸다가 안되자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의 손을 잡았다.
기업에 융자를 알선하는 기업 '컨피규어 파트너스'에 따르면 1년 전만 해도 지역은행들이 모든 대출거래의 약 1/4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15%로 줄었다. 사모신용펀드가 그 격차를 메우고 있다.
사모신용펀드에게 날개를 달아준 조건들은 역으로 실물경제엔 우려스런 요인이다. SVB 파산 전에도 체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자금을 융통하기 어려웠다. 기준금리 상승 때문이다. KKR 사모신용펀드 부문 글로벌 대표인 댄 피트자크는 "중소기업과 소비자가 신용에 접근하기 힘든 상황은 매우 걱정스러운 요인"이라고 말했다.
사모신용펀드들도 모든 이를 구제하는 건 아니다. 중고차매매기업이자 서브프라임금융사인 '아메리칸 카센터'는 2022년 말 은행을 통한 융자가 힘들어지자 사모신용펀드사들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펀드가 없어 올해 3월 결국 파산했다. 다른 소비자금융 기업들도 비슷한 궤적을 밟을 수 있다.
은행이나 사모기업에서 대출을 받기 어려워지면, 기업은 결국 문을 닫는 수밖에 없다. 신용으로 자동차나 주택 등을 구입하려는 소비자들도 줄어든 선택지에 고전하게 된다. 경쟁이 줄어들면 내야 하는 이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모신용펀드의 몸집이 커지면서 투명성 우려도 커지고 있다. 사모펀드는 은행만큼 촘촘한 규제를 받지 않는다. 공개시장에 비해 투자실적에 대한 정보도 부족한 편이다. BBW는 "하지만 일부 소비자나 기업들에겐, 사모신용은 그나마 두드려볼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