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유튜버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던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도로에서 불과 600미터 떨어진 곳에선 주목받지 못하는 영세 기업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회생법원 2층 ‘제1호 법정’(209호)의 풍경이다. 1호 법정은 개인과 법인 파산·회생 사건을 다루는 곳이다.
이날 기자가 가본 300여석 규모의 1호 법정에선 ‘대종상 영화제’를 주최하는 사단법인 한국영화인총연합회의 채권자 집회도 열렸다. 이 연합회는 지난해 말 법원의 파산 선고를 받았다. 연합회 쪽은 “코로나 기간에 대종상이 정상 운영되지 않아 수익이 감소하고 경기 악화로 작년, 재작년 적자를 낸데다 정부 지원금마저 끊겼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 파산부 수석부장판사를 지낸 김정만 법무법인 정행인 대표변호사는 “정부의 코로나 대출 지원 정책 약발이 사라지고 금리 인상 여파로 버티다 못한 중소법인들의 파산 신청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법인의 파산 및 회생 접수 건수는 각각 1657건, 1024건으로 역대 최대였다. 고금리가 본격화하며 빚 부담을 이기지 못해 회사를 청산하거나 채무 탕감을 바라는 중소기업들이 법원에 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올해 사정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다. 반도체·자동차 등 일부 수출 업종을 제외한 경기 전반의 부진이 계속되고, 코로나 기간 대폭 불어난 부채가 고금리의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어서다. 2019년 말~지난해 9월 말 사이의 중소법인 대출액 증가분(318조8천억원) 중 절반에 가까운 153조원(47.8%)은 대출 금리가 연 10%를 웃도는 비은행권 대출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코로나 기간 미국·영국 등 주요국은 정부가 경기 급락을 막기 위해 빚을 크게 늘렸지만 우리는 주로 민간이 부채 부담을 안고, 금융사들도 가계 대출 규제 강화를 피해 중소기업 대출을 크게 늘렸다”고 짚었다.
반면 10여년 만의 고금리를 감당해야 하는 기업들의 기초 체력은 취약한 상황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상장회사 기준) 가운데 연간 이자비용이 영업이익보다 더 많은 ‘취약 기업’ 비중은 2018년 말 45.9%에서 지난해 상반기 말 58.9%로 껑충 뛰었다. 같은 기간 대기업의 취약 기업 비율이 21.6%에서 30.9%로 증가하는 데 그친 것과 대조적이다. 중소기업 절반 이상은 본업에서 번 돈으로 이자조차 갚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나마도 이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상장기업 위주의 통계인 터라, 소규모 영세 기업을 포함한 실태는 이보다 훨씬 열악할 가능성도 크다. 지난해 매출 감소, 이익률 하락 등 실적 악화를 겪은 중소기업 입장에선 고금리 빚 상환 부담이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이야기다.
중소기업계는 ‘4월 총선 직후 자금난 본격화’ 우려에 벌써부터 전전긍긍하고 있다. 대형 선거를 앞두고 줄폐업에 따른 일자리 감소를 원치 않는 정부와 정치권 압력이 사라지면 대출 채권을 보유한 금융회사가 영세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줄줄이 강등하고 무더기 대출 회수에 나서 돈줄이 끊기는 신용 경색의 태풍이 몰아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자료를 보면, 국내 중소법인의 은행권 대출 연체율(한달 이상 원리금 연체 기준)은 지난해 11월 말 기준 0.64%로 대기업(0.18%)과 가계(0.39%) 연체율을 훌쩍 넘어선다. 일찌감치 빨간불이 켜진 셈이다. 국내 일자리의 80% 이상을 떠받치는 중소기업 줄도산은 일자리와 내수 악화를 초래하고, 자금난이 연구·개발(R&D) 투자 감소로 이어져 생산성 부진이 장기 지속되는 이른바 중소기업발 ‘이력효과’를 부를 수 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여러 전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탄소 전환 비용 증가, 인구 고령화 등을 고려하면 코로나 이전과 같은 저물가·초저금리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며 “자산이 건전하고 수익이 나는데도 당장 현금이 없어 일시적 위기를 겪는 기업엔 정부가 유동성을 충분히 지원하고, 본업에서 계속 손실을 보며 적자를 돌려막는 한계 기업은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유도하는 등 옥석 가리기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